누군가의 메모장

작지만 거대한 것-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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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창문 안쪽에서 흩날리는 바깥 풍경을 보고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

바람이 촉각이 아닌 시각으로 느껴진다는 건 과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엄청난 일이다. 시력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고 때론 평범하지 않은 강한 바람에 눈길이 가기도 하지만, 그저 가볍게 살랑거리는 바람을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살랑거림을 귀하게 여길 수 있다는 건 이 세상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길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겠다는 용기

평생을 살아가며 몇 명의 사람과 손을 잡았나 더듬더듬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세어본다. 좋아하던 사람과 처음으로 손을 맞잡던 날엔 손바닥이 간질거렸고, 왈칵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의 손을 잡으면 나도 모르게 힘을 주게 됐었고, 무뚝뚝한 가족의 손을 잡는 날이면 손가락의 위치마저 어색하게 느껴져 콧잔등이 가려운 척 금세 손을 빼버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어쩌다 작은 북토크에 참여하고, 누군가의 이야기에 반응을 하고, 어떤 글을 모두와 공유하고, 약속된 장소에 모여 함께 목소리를 내는 날이면 내 손에 잡힌 사람의 수를 감히 떠올려봤다. 그럼 이 작은 손은 무한히 거대해진다.

잡초라는 것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감명있게 읽은 내가 책을 쓴다면 아마 그 책의 제목은 <잡초는 존재하지 않는다>일 것이다. 어느날 문득 나는 잡초가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특정한 식물의 종을 분류하는 단어가 아님에도 쓸모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잡초로 묶여 어떤 곳에서는 무참히 베어지지만 또 어떤 곳에서는 저절로 피어나 꼿꼿하게 고개를 세우는, 그 콧대 높은 풀 말이다. 그러다 검색 페이지에서 본 '때와 장소에 적절하지 않은 식물이다'라는 문장이 마음에 콕 박혔다. 아, 세상이라는 건 정말 쓸모없고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그토록 대단한 발명이라 여기는 문자로 저따위 정의를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잡초라는 것들은 기꺼이 인간과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벌레 먹은 나뭇잎으로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는 것

어릴 적 나는 유달리 하늘을 보며 걷는 걸 좋아한 나머지 모든 장애물에 부딪혀 종아리에 알록달록한 멍을 달고 자랐다. 그중에서도 나는 나무 밑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을 가장 좋아했다. 벌레 먹은 잎이라도 있으면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구멍을 파고든 햇빛을 눈에 담느라 바빴다. 빼곡한 나뭇잎, 벌레가 지나간 흔적, 찬란한 햇빛, 그건 내가 나뭇잎으로 별을 보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