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 아닌 음악을 들었고, 평생 안 봤을 몇 편의 영화들을 봤고, 갈 생각도 못 했던 도시로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이건 나의 아주 작은 짝사랑 이야기다. 너무 작아서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마음을 이곳에 풀어내는 건 나조차 다시 읽지 않을 일기장에만 남기는 게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나에겐 4년 동안 좋아했던 아이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4부터 중1까지 좋아했고 고2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보곤 단번에 다시 그 애가 좋아졌다. 그때의 난 울면서 집에 가는 날이 허다했는데 하루는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벅찬 나머지 '이 감정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더 커서 사랑이 뭔지 알게 된 날 오늘을 돌이켜 봤을 때 이게 사랑이 아니었다면 억울해 죽을 듯' 라고 생각했다.
그 애를 좋아하며 생긴 일화들이다.
- 도서관에서 그 애를 다시 본 날, 나는 영화 속 슬로우모션 연출이 아주 망상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 나와 친해지고 싶다던 그 애의 말을 전해 듣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사람 갖고 장난치지 마'라고 말했다.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 고2 때까지 반에 핸드폰이 없는 애는 나뿐이었으면서 단 한번도 부모님께 사달라 말하지 않았던 내가 그 애랑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핸드폰을 만들었다. 8월 31일이었다.
- 당시 개봉한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영화가 보고 싶다던 그 애의 문자에 '그치만 난 돈 없는 고등학생인걸?' 라고 답장했다. 같이 보자는 말인 줄 몰랐다.
- 집에서 뒹굴거리며 '혹시 ㅇ근처야? 지나가다 너 본 거 같아서!' 라고 몇 번이나 문자를 보냈다. 당연하게도 ㅇ근처는 걔도, 나도 지나간 적이 없다.
- 고작 짝사랑이었던 주제에 그 앨 잊는 게 너무 힘들어서 내가 얠 잊는다면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과 어떤 사랑을 하든 그 누구도 잊을 수 있겠다는 확신을 했었다.
- 윤하의 '기다리다'가 당시 나의 무한반복 곡이었다.
- 그 애의 핸드폰 번호를 아직까지 외우고 있다.
이때의 짝사랑은 종결된 지 오래지만 줄곧 궁금했다. 언젠간 내가 다시 또 누군가를 짝사랑하게 될까 하고 말이다. 몇 주 전에야 깨달은 이 감정은 이미 반 이상이 접힌 채로 반듯하게 놓여져 있다. 애써 노래가 좋다며 공감대를 찾으려 했던 나는 정말로 그 노래 장르가 좋아졌고, 그 영화들은 여전히 취향이 아니지만 계속해서 비슷한 영화를 찾아보곤 하고, 가 볼 생각을 전혀 못 했던 도시는 아마 나의 홀로 떠나는 두 번째 해외 여행지가 될 것이다.
아주 작은 짝사랑의 흔적은 꽤 오랫동안 내 일상 곳곳에 선명하게 남겨져 있을 것이다. 슬프고 애절한 모습이 아닌 밝고 경쾌한 모양으로. 동글동글하고 제멋대로 뾰족뾰족하려나? 반듯한 사람이니깐 분명 각진 흔적도 있을 거야. 색은 알록달록할 테고, 촌스러운 색도 아주 쨍하게 칠해져 있겠지.
하고 싶은 말이 남았지만 더 써 내려가자니 아주 작은 짝사랑이 아닌 꽤 규모 있는 짝사랑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이만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