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메모장

차밭 생각8

차밭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건 차밭에서 하는 생각들.

2025.11.27

숨 가쁘던 준비 과정을 지나 행복과 즐거움이 가득했던 행사 당일을 또 지나 이젠 조금은 고요하고 침전된 하루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런 하루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나 또한 비슷하게 가라앉고 이내 무슨 금의환향이라고 기대했던 거냐며 과거의 나를 질책하게 되기도 한다. 차를 계속 좋아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이 일을 시작했다. 싫어지는 순간도 마땅히 받아들이겠다는 자그마한 다짐과 그럼에도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기대 희망 혹은 집착 불안 이런 게 크게 엉켜있었다.

차가 싫어졌다는 선생님의 말에 나는 이런저런 말을 고르다 고르다 차는 정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어쩌면 우리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하고 사랑했던 건 차가 아니라 우리의 움직임이었을 거라는 말을 내뱉었다. 내 안에 있었던 말인지 위기감에 즉흥적으로 만들어 낸 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게 아닐까. 차는 그저 도구일 뿐 차가 지금의 나를 힘들게 한다면 그건 더 이상 우리가 차라고 이름 붙였던 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아?

3년 전 정말 우연히 티백 하나를 머그컵에 우려낼 힘을 낼 수 있던 날이 있었다. 그 작디 작은 힘이 그 움직임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까지 닿는다. 나는 그 움직임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 뿐이다. 그러니깐 사실 차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12월엔 차분히 앉아 차를 마시고 싶다. 남들 우려주면서 한 잔 맛 보는 게 아니라 나를 살렸던 그 작은 움직임으로 차를 마시고 싶다.

오늘 녹차를 우리는 내내 찻잎이 예쁘게 불어나고 둥둥 떠다녔다. 그 모습이 기특하고 예뻤다.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