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메모장

차밭 생각9

차밭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건 차밭에서 하는 생각들.

2025.12.07

다신전(茶神傳)을 읽고 있다. 어떤 찻잎을 언제 수확해서 어떻게 제다하고 우려야 하는지부터 어떻게 누구와 차를 마셔야 하고 차를 대하는 마음까지 모두 나와있다. 이를테면 주전자에서 수증기가 한 줄기로 나오는 건 일루(一縷)라 하는데 일루, 이루, 삼루 모두 차를 우리기엔 적합하지 않다. 김이 세차게 탕관 밖으로 뿜어져 나올 때가 바로 경숙(經熟)이다. 끓는 물의 생김새 내용도 재밌다. 물이 점점 끓어오르며 유리 탕관 벽면에 기포가 자잘하게 생기는 것을 게의 눈이라 표현하고 게의 눈에서 하안(새우의 눈), 어안(물고기의 눈), 연주(이어진 구슬)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물들은 맹탕이라고. 그리고 마침내 공기방울이 세차게 솟아 오르면 그게 순숙(純熟)이라 한다. 그리고 그때 물 속의 기운이 사라졌다고 표현하는데 유추하건대 물의 기운이 모두 증발되어야만 차를 품을 수 있는 그릇 같은 게 되는 게 아닐까. 아 아무튼 정말 재밌다.

2025.12.08

어제 이후 '다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대표님에게 다신이 도대체 뭔지 여쭤보고 답을 들었는데도 잘 와닿지 않아서 동료 선생님에게도 여쭤봤다. 선생님은 이미 내가 알고 있고 매일 경험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나는 잘 모르겠다.

2025.12.09

동료쌤께서 자신이 적은 다신에 대한 초고를 나에게 빌려주셨다. 딱 한 명밖에 읽어본 적 없는 글이라며 지원쌤은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반듯하게 잘린 종이가 클립 여러 개로 단단히 고정된, 이미 책인 것을 나에게 주셨다. 감히 읽어도 되는 걸까 싶어 그걸 받아 들고 덥석 잡지도 못한 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멍하니 보기만 했다. 정말 제가 이걸 읽어도 되냐고 몇 번이나 묻고 나서야 가방에 담아 집으로 왔다. 혹여 상할까 뾱뾱이에 감싸서.

2025.12.10

21살이 되던 1월 1일 할머니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던 차 안에서 엄마에게 휴학하고 싶다는 말을 했던 날이 생각이 났다. 엄만 자긴 모르겠으니 아빠한테 허락받으라는 말만 했다. 아빠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써내려갔던 편지가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그러니깐 나를 찾겠다는 내용의 편지.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 치곤 굉장히 호기로웠던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줄곧 그 휴학을 도망이라 여겼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도 이유를 설명하며 도망이라 말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른 생각을 한다. 도망이었지만 떠나보니 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차 기록을 몇 페이지 읽다 얼마 못 가 이상하리만큼 펑펑 울었다. 더 읽을 자신이 없어 핸드폰을 내내 보다 자정이 넘어서야 내가 불안해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침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모든 상황들이 요즘의 내 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 큰 것도 아닌 것들이 옹기종기 모이니 작고 큰 불안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나를 알아차린다. 나를 알아간다. 그러니깐 정말 여정이었을지도. 비로소 여정의 첫 번째 결실이 드러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25.12.11

며칠 전 선생님께서 카톡으로 보내온 '차가 싫어졌다'라는 말이 자꾸만 같이 읽혔다. 내 과거도 같이 읽혔다. 처음으로 차를 마시게 된 날, 유리 티포트에서 끓어오르는 물방울들을 보고 찻잎이 색을 내뿜는 것을 가만히 가만히 봤던 날들, 차에 대한 모든 기억들이 활자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기록에서 '사랑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 수십 번 반복되고 있었다. 그곳에 적힌 사랑은 너무 커다래서 읽는 것만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고 내 안에 잠겨 있던 사랑도 몸집을 크게 부풀리고 금라도 입밖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자 눈물이 나왔다. 차. 머릿속에 이젠 온통 차라는 단어만 가득했다. 다신전에는 찻잎을 우리는 물의 위치를 설명한다. 하투, 중투, 상투. 하투의 찻잎이 된 것만 같다.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받아내고 솟아오르는 물방울과 함께 헤엄치다 못해 떠밀려 요동치는 찻잎. 울컥울컥 차오르는 선생님의 차에 대한 사랑을 담아내다 더 담아낼 자리가 없어 내 것을 뱉어낸다. 나는 퉁퉁 불어나고 내것이었던 것들이 추출되는 것을 지켜본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렇게나 우는 건지 알 수 없다. 무엇을 향한 울음인 건지 더 정확하게 따지자면 연민인 건지 존경인 건지 두려움인 건지 원망인 건지 고독인 건지 사랑인 건지 알 수 없다. 차. 또다시 차가 떠오른다. 차를 생각한다. 너무 작은 단어에 지나치게 거대한 것들이 담겨있다. 다시 숨이 막힌다. 그동안 마셨던 차들이 목 밖으로 쏟아질 것 같다. 처음으로 차가 무섭다. 차로 살려진 목숨이니 차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2025.12.14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는데 떨어진 낙엽이 햇볕에 바짝 말라 발걸음을 내딛 때마다 튀김을 밟는 듯한 소리를 냈다. 바스락도 아니고 진짜 바삭바삭. 저항도 없이 잘게 부서진다. 낙엽은 나무가 겨울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한다. 소리가 듣기 좋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낙엽을 밟았다. 잎이 점점 흙으로 변했다. 아 흙이 왜 갈색인가 했더니 죽어간 모든 것들이 모이는 곳이라서 그렇구나. 죽은 것들은 새로운 생명의 자양분이 되어 다시 탄생을 경험하는구나. 낙엽이 흙이 되고 다시 뿌리로 흡수되어 새싹으로 피어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죽은 것들을 밟으며 봄을 떠올렸다.

2025.12.21

선생님의 초고를 읽어내는 것은 내 삶을 읽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고통스럽고 황홀해 눈물이 계속 났다. 이유와 목적 없이 흐르는 눈물을 마주하면 내 자신이 의문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이내 이유와 목적이 없는 것이 비단 눈물뿐만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유와 목적 없이 시작된 삶이다. 그러니 당연히 동시에 고통스럽고 황홀할 수밖에.

2025.12.22

난 뭐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