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메모장

차밭 생각4

차밭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건 차밭에서 하는 생각들.

2025.07.09

더위가 좀 사그라들고 아스팔트 열기도 그리 뜨겁지 않을 때 퇴근했다. 바람이 밉지 않으니 살만한 날씨다. 간만에 달갑게 여겨지는 바람에 팔을 뻗고 손을 펴서 바람을 만졌다. 귀를 막아도 눈을 감아도 바람은 느껴지는구나. 그러니깐 궁금해지는 거다. 바람을 그림으로 그리면 어떻게 그려야할까. 풍성하고 폭신한 모양이 생각났다가 거센 바람을 떠올리니 뾰족하려나 싶다가 문득 바람에 흩날리는 것들이 보였다. 곧이어 바람에 흩날리지 않은 멈춘 것들도 보였다. 그러니깐 기꺼이 흩날리고 싶어졌다. 나를 통해 바람이 보인다면 흔들려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2025.07.14

곧 중작 녹차를 수확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금 차밭은 덩굴과 잡초로 뒤덮여있다. 저것들을 다 어쩐담 어떻게 다 끄집어내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자면 작년 잡초에 대해 쓴 메모가 떠올려지고 괜한 죄책감도 느낀다. 잡초는 펄펄 끓는 태양이 무섭지도 않은지 쑥쑥 자란다. 식물들도 여름에는 힘들어한다는데 잡초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하늘로 고개를 치켜들고 옆 식물들을 잠식해 나간다.

점심을 먹고 오랜만에 곶자왈을 걸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숲은 서늘했고 어두웠고 기이하고 황홀했다. 우거진 나무 틈 사이로 희미한 빛 몇 가닥만 숲 속에 닿았고 그 곳에 있자면 낮인지 저녁인지 새벽인지 모를 만큼 시간의 흐름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을 거라고 섭리에 어긋난 이상한 생각을 한다. 자연은 언제나 그랬다. 섭리와는 정반대의 비현실적인 감각을 느끼게 한다. 얼마나 오래 뿌리를 내리고 있엇을까 감히 예측도 못할 나무의 단단한 껍질에 손을 대어보면 나에게 무어라 말을 거는 것만 같았고, 사람이 없는 길 저 편에 풀이 우거진 곳을 바라보면 그 어떤 도심 속 인파에서 느끼지 못했던 뭉텅이의 생명이 느껴졌다. 자연에 더 깊숙히 존재할 수록 내 존재는 희미해지고 내가 경험한 자연스러운 것과 멀어진다. 그럼 내가 무엇을 감히 자연스럽다고 여겨왔던 걸까 나의 자만심에 딴지를 걸게 된다. 자연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과 위안, 그 어떠한 틀도 거부한 채 낯설고 예측할 수 없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아주 잠시 깨달아본다. 내일이면 또 망각하게 될 것을 안다. 조망자가 아닌 그저 먼지 한 톨에 불과한 생명으로 나또한 존재해본다. 숨을 내쉬어 본다.

2025.07.23

야생 차나무는 12m까지도 자란다는데 얘네는 90cm까지 이상을 자라지 못한다. 전정(가지치기)을 끝낸 차나무는 거의 옆머리만 남은 탈모 진행상황을 보는 것만 같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지만 인간의 시선이라는 걸 안다. 암튼 이제 저 줄기로부터 또다시 새싹이 나올 거다.

차밭은 언제나 아름다운 초록빛일 거라 생각했는데 요즘의 차밭은 굉장히 휑하고 삭막하기도 하다. 내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없구나 차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저런 과정도 거쳐야 하는 구나 싶었는데 오늘 대표님도 딱 그 말을 하셨다. 차나무의 이런 모습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좋았다.

점심을 먹고 땡볕 아래에서 차나무를 가까이서 봤다. 어제 전정을 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어떤 찻잎들은 이미 갈색이 다 돼서 햇볕에 건조된 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고 어떤 찻잎은 그 과정 중에 있었다. 아직은 초록빛이 나지만 수분이 증발되며 산화되는 향을 내뿜고 있었다. 그 찻잎들 앞에 쪼그려앉아 한동안 냄새를 킁킁 맡았다. 아직 잎이 풍성한 차나무 위로도 고개를 파묻고 숨을 들이켰다.

차밭 옆으로 움푹 파진 곳에 나무들이 씨를 뿌려 작은 숲이 만들어진 곳이 요즘 내 최애 장소다. 숲을 조망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은 이후 나는 매번 그곳에 가서 하늘이 된 것마냥 혹은 새가 된 것처럼 나무들의 정수리를 오목조목 살펴보고 괜히 참견도 한다. 넌 좀 얠 괴롭히고 있는 거 같은데 좀 옆으로 비켜봐. 이런 실없는 말따위 나무들이 알아들을리 없다.

그럼에도 내가 계속 말을 거는 나무가 있다. 동료쌤의 조언을 듣고 말을 계속 걸고 있는데 마법처럼 내가 나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봤지만 턱도 없다. 마법같은 일이라고 표현되는 이유가 있다. 안 일어난다. 그래도 말은 계속 걸어볼 예정이다. 안녕 오늘도 왔어 이제 더워서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들어 근데 자주 보면 언젠간 네가 나한테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담에 또 올게 잘지내고 있어 휴 이제 일하러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