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밭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건 차밭에서 하는 생각들.
2025.02.12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눈물이 터져나왔다. 무언가에 합격하고 우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간절함이었다.
2025.03.02
매일 아침 수선화 상태를 확인하고 수선화를 따는 게 내 일이다. 행복해. 나중에 이 일이 익숙해지고 그래서 무던해지고 결국 지겨워지더라도 지금 느낀 행복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5.03.07
10분도 채 앉아있지 못하고 내내 일어서서 일을 한다. 생각보다 더 바쁘게 흘러가는 8시간이다. 집까지는 또 엄청 걸리고.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저녁 7시 반에 집에 도착하고 10시면 기절하듯 자는 일상이 반복된다. 친구들과 행사들 프로그램들이 아른거리고 슬프다. 내 삶의 즐거움이었던 것들이 멀어져간다. 캘린더를 보니 촘촘하게 적혀있던 일정들이 이제는 텅 비었다. 서울에서는 가고 싶은 행사들이 하나 둘 열리고 또 사전 접수도 시작했지만 나는 주말에도 일하는 몸이 됐다. 제주도 프로그램도 다 주말이다. 자꾸만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게 되는, 행사 열리기 딱 좋은 계절이 오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충만함을 느끼니 굉장히 운이 좋다. 일이 재밌고 함께 일하는 분들이 좋다. 이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로 좋다. 일주일하고도 3일밖에 안 지난 시점에서 구태여 김칫국을 마시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좋은 것은 좋다 말하고 충분히 만끽하고 싶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나에게 주어진 상황만큼.
바빠서 좋다. 더 바빠지겠지만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더 한 것도 겪었고 덜한 것도 겼었다. 배우고 싶은 일로 바쁠 수 있어 다행이다.
과거들이 나를 돕고 있다. 그러니깐 내 미래가 어떻게되든 전혀 다른 길을 가든 아님 또다시 멈추게되든 오늘의 내가 다음 날의 나를 기꺼이 도울 것을 안다.
제일 좋은 건 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 집에 오면 공부하고 외울 게 투성이고 밀린 도파민도 채워야 한다.
하고 싶은 게 많다. 하기 싫은 것도 많다.
머 어쩌라고.....
머....
뭐든 그럴 수 있다. 뭐든 적당히 그럭저럭 살고 싶다.
2025.03.08
차는 정말 답이 없구나 느낀다. 차는 잎이 온전해야만 더 맛있는 차로 생각했는데 오늘 우린 홍차는 부서진 잎을 반으로 채우니 더 맛있었다. 이름이 똑같은 홍차라도 우림법이 모두 다르다. 결국 차마다 가장 맛있게 우려지는 방법이 다른 거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수가 따르고 있는 방법이 정답이 아니다.
정말 정말 작은 변화, 이를테면 찻잎이 부숴진 정도 라든가 물이 팔팔 끓었을 때 붓냐 아님 포트의 뚜껑을 열고 한 김 날린 후에 붓냐 그 몇 초의 차이, 물의 양이 10ml 더 많냐 적냐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걸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느낄 필요도 없고 느끼지 않고서도 찻자리는 충분히 즐길 수 있지만 나는 느끼고 싶다. 언어화할 수 없는 것들, 정말 작아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감각하고 싶다. 알고 싶다. 배우고 싶다.
2025.03.11
왜 나는 뭐든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그냥 그림책을 읽으면 될 걸 꼭 내가 만들고 싶어하고 그냥 차를 마시면 될 걸 우려주고 싶어하고 그냥 지갑을 사고 그립톡을 사고 가구를 사고 뭐가 됐든 사면 될 걸 만들고 싶어하고 무서운 게 많으면 그냥 무섭게 살면 될 걸 다 극복하고 싶어하고 소심하면 소심하게 살면 될 걸 굉장히 다부진 척 살아가려하고. 생각이 많아진다. 이것도 그래. 생각이 많으면 생각이 많은 채로 살면 되는데 생각을 없애고 평온해지려고 하고. 생각을 하는 채로 평온해지는 방법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2025.03.14
차를 덖다보면 콩이 생긴다. 축축해진 찻잎들이 강하게 비벼지며 서로 붙어진 채로 잘 풀어지지 못한 애들. 진짜 콩처럼 생겼다. 차를 덖을 땐 콩을 볶는 냄새가 난다. 그리고 솜털이 입혀진 찻잎들은 햇빛 아래에서 황홀한 광경을 만들어낸다.
내 차에선 조마조마한 맛이 들어간다. 잘 우려야겠다는 마음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난다. 엉덩이와 배에 힘을 주고 단단한 마음으로 차를 우려야해. 차를 대하는 마음이 곧 나를 대한 마음이겠구나 싶다. 나를 대하는 마음이 차에서도 보인다니 싫지만...그래도 차를 대하는 것만큼 나를 대한다면 나또한 잘 우려지겠다고 생각했다.
2025.03.17
말차를 격불할 때 나는 조급하고 욕심이 많아진다. 그러니 속도도 힘도 일정하지 못하고 찻물 안에 내 조바심이 들어간다. 격불을 뜻을 상기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이 모든 것들을 떨치겠다는 마음으로 하다보면 손목에 들어간 힘이 조금은 약해진다. 큰 거품을 잘게 쪼개고 차선을 따라 둥글리고 가운데에 거품을 모아 올린다.
차를 마신다는 건 차를 우리고 맛을 느끼는 것 이상의 것을 배운다는 대표님의 말씀을 상기한다. 미묘한 변화에도 달라지는 차를 마시며 나는 그 안에서 나를 본다. 차를 더 세심하게 다룰 줄 알게 된다면 나또한 알 수 있겠지, 다룰 수 있겠지 하고 어렴풋 깨닫는다.
내 차에서는 여전히 조바심의 맛이 나지만 언젠가는 다정하고 세심한 것이 나길 바라고바라고........근데 또 이제 너무 바라는 건 과하니깐 이쯤해야지하고 또 생각을 멈춘다. 언제나 그렇지만 생각이 많다. 격불을 평생 해야 그나마 덜 무겁게 살겠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