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밭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건 차밭에서 하는 생각들.
2025.3.20
저 사람을 신기하게 부럽게 본다. 어떻게 키워졌으면 저럴까. 신뢰와 이해가 충만한 말이 오고 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나는 왜 저런 말을 듣지 못하고 자랐나 한스러워졌다. 그리고 이내 이제는 그런 말을 하는 엄마를 떠올렸다. 결국 우리도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세상에 갓 나온 나를, 시시각각 자라고 변하는 나를 이해할 시간이 엄만 30년이 필요했던 거고 앞으로도 계속 필요할 뿐이다. 타인을 멋대로 판단해버리고 내 과거를 아쉬워하며 구태여 한스러워 할 이유 같은 건 없던 거다. 그건 오만한 거야.
2025.03.21
내내 예민하고 스트레스 받았다가 드디어 오늘 그 모든 긴장이 한번에 응축되었다 풀렸다. 열심히 했냐 스스로에게 물으면 아니라는 대답만 나왔는데 끝나고 나서야 나 진짜 열심히 했어 라고 그제서야 답한다. 나는 내가 잘해야만 나를 인정할 수 있나 보다.
나만의 말하는 방식이 있다 했다. 똑같은 내용으로 발화하는 것뿐인데도 내가 말하는 방식이 담긴다고 했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게 느껴지고 그 모습이 내 힘처럼 느껴진다고 해주셨다. 차분하다고도 했다. 나는 진짜 차분이랑 거리가 먼데....지나치게 덤벙거려서 차분해져야 하는 사람인데 그걸 노력하다 보니 차분한 사람처럼 보이나보다.
원장님이 해주셨던 말이 또 생각난다. '지원이는 어딜 가든 사랑받는 직원이 될 거야.'
찻잎에 기공이 있듯이 그래서 바람과 주변의 향기가 스쳐지나가듯이 나에게도 기공들이 있나보다. 보드랍고 푸른 바람이 나를 통과한다.
2025.03.23
두 번째 티클래스 그리고 첫 판매! 차를 모두 우려드렸는데 마지막에 내 이름을 물어보고 가셨다. 일기장에 적고 싶다고 하셨다. 누군가의 일기장에 내 이름이 쓰인다. 신기해. 온몸이 무겁고 손톱 주변은 잔뜩 갈라지고 얼굴엔 열이 오르지만 벅차오르는 하루다. 기분이 좋은 거랑은 또 달라. 배가 고프다. 어깨를 몸에서 다 빼버렸다가 다시 끼어넣고 싶다. 당장 길거리에서 자고 싶다.
2025.03.29
일본에서 기계 설치 직원이 왔고 얼떨결에 내가 통역을 하게 됐다. 10년 만에 쓰는 일본어였다. 중학생 때 배운 걸 가지고 지금까지도 써먹는다. 예상치 못한 기회와 발현이 일상에서 나타난다. 뭐든 열심히 하면 흔적을 남기나보다. 그 흔적을 가치 있게 여기냐의 문제인 거 같아.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삶을 꾸려갈지 정말 암것도 모르고 그냥 현재의 시점에서 노력할 뿐이지만 그 노력과 심지어는 주저하고 방황하는 것마저 내 미래와 연결된다. 우연의 힘과 내 선택을 믿는다.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포기와 같은 선택일지라도.
2025.4.16
불확실함을 꿈꾸는 슬픔을 먹고 자라는 씨앗도 있을 터였다.
2025.4.17
두둥실 떠오르기 앗 아닌가 가라앉기. 뭐가 됐든 그저 내 무게만큼 침하기.
2025.4.18
어제 생엽(잎)을 따서 차로 우려 마셔봤다. 작은 새싹이 뜨거운 물에 휘감겨 떠오르더니 이내 다시 천천히 떠올랐다.
얼마 전에 새싹을 톡 따서 먹었을 땐 약간 달큰한 풀맛만 나더니 가득 모아서 향기를 맡아보자 꽃향이 어마어마하게 났다. 풀에서 꽃향이라니. 어째서 옛날 사람들은 차나무를 먹을 생각을 한 걸까 의문이기만 했던 의아함에 아주 커다란 해답을 얻은 것만 같았다. 향기가 해답이 되기도 한다니.
뜨거운 찻물에서는 더 깊은 꽃향과 풀내음이 진득하게 났다. 그리고 두 번째 우림에서는 좀 더 조화로운 맛. 그렇게 네 잔, 다섯 잔 마시다보니 속이 아려왔다. 처음엔 그냥 헤실거리며 생엽은 이렇게 차가운 기운이 있구나 싶었는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배가 엄청나게 아파왔다. 황차나 홍차라도 마셔야 하는 거 아니냐는 동료의 물음에
저 차 안 마실래요.........
라고 답했다. 황홀하다가 저세상 갈 뻔 했다.
2025.04.19
무언가를 좋아할수록 판단하지 않는 법을 잊곤 한다. 이상하지. 그토록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을 텐데 가끔은 그 이유가 사라진 듯 행동하게 된다. 그 무언가를 이제는 충분히 안다는 자만심과 좋아할수록 커지는 욕심은 오히려 처음 마주했던반짝거림을 흐릿하게 만든다. 다음에 찻집에 가면 차를 평가하듯 마시지 말아야지. 내가 차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곱씹어야지. 곱씹고 곱씹고 곱씹고 차랑 같이 삼켜버려야지.
2025.04.20
차밭까지 15분 떨어진 곳에 김밥집이 있다. 배가 너무 고프거나 점심을 못 싸가면 김밥을 사곤 하는데 사장님은 나를 공주라고 부른다. 차밭 세계에선 내가 공주요....? 암튼 오늘도 김밥을 사는데 익숙한 옛날 커피 냄새가 나는 거다. 옛날 할머니집에서 나던 가루 커피향. 알고보니 사장님의 지인이 가게 잠깐 들렀고 사장님은 그냥 돌려보내기 아쉬운 마음에 커피를 타고 있었던 거다. 그 향이 좋았다. 온갖 휘찬란한 향을 품고 있다는 원두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리움의 향이었다. 그리고 나한테도 커피 타주심. 오예!
2025.04.22
단단해지고 싶었던 내가 더 이상 단단해지고 싶어지지 않게 됐다. 너무 단단하면 부러지는 법이었고 나는 그만 부러지고 싶었다. 그러니 어쩌면 겁이 많아진 거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단단함을 이미 얻었기에 놓아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정반대의 가설을 동시에 세우곤 한다. 무엇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은 둘 다 맞을지도 모르겠지. 다만 나라는 사람은 결코 계속 단단하지도 마냥 말랑하지도 않다는 것을 사람은 당연하게도 어떨 때는 굳건하고 어떨 때는 연약하다는 것을 지금에 이르러서야 아는 것 이상으로 깨달았다. 생명은 결코 고정된 모습으로 살아지지 않는다. 삶은 내가 살아있음을 알아차리는 과정 같아.
라고 찻잔을 깨뜨리고 생각했다.